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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겸 칼럼]차란 무엇인가?

기사승인 2018.10.17  13: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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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차(普洱茶), 올림의 고급 차문화에서 나눔의 일상으로

[여성소비자신문]“차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늘 스스로에게 한다. 참선의 화두(話頭)처럼 늘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에 남아 돌고 또 돌며 항상 다른 모습으로 질문을 이어간다. 물질인 차에 대한 질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문질인 차에서 파생된 문화 전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나를 바로 볼 때는 화두로서 스스로가 꿈꾼 미래를 향해서 가는 기나긴 인생에 여정에서 지금 바로 어디에 서 있는지를 반추(反芻)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하지만, 같은 잣대로 나만이 아닌 남까지 볼 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인연이라는 인드라망 속에서의 사람들간의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의 해결방법을 차 한잔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이 있다. 다성(茶聖)으로 알려진 초의선사(草衣禪師)는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과 도(道)의 자향점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우리의 생활 속에 있다는 이른바 다선일미를 주장했다.

하지만, 초의선사가 차를 잘 만들고 우린 것은 어느 정도 증명이 되고 있긴 하지만 그분이 정말 다성인지, 나아가 차에서 성취한 만큼 참선에서 깨달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다선일미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가르치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차를 동떨어뜨리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사람과 차가 다르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차를 통해서 사람을 배워사고 세상을 알아가며 ‘도(道)’를 깨치라는 말로도 해석이 된다. 결국 일상 속에서 몰록 깨닫는 선의 묘미가 차 한잔을 나누면서 느끼는 인생의 맛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다.

한 아름다운 절에 버스 한 대가 도착한다. 버스 안에서 우르르 중년이라는 나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곱게 보이는 부인들이 내린다. 가져온 차와 다구(차도구) 그리고 다식(차마실 때 같이 곁들이는 음식) 등을 챙기며 왁자지껄하며 부산스럽다. 법당 구석에서 참선을 하던 이들은 방석을 털고 나가며, 그들의 진한 화장과 향수는 부처님의 묘한 자취를 남긴 불향을 지운다.

다례(茶禮; tea ceremony)는 신불(神佛)과 함께 하늘과 같은 사람에게 차탕을 바치는 예의를 말한다. 하지만, 그 예의를 들먹이면서 주변의 차를 모르는 이들에게까지 하나하나 지적질을 하며 가르치려고 하는 모습은 차인(다인)스럽지 못하다.

선다일미는 차치하고 그들이 칭송하는 선사의 ‘초의’(草衣)라는 이름에도 걸맞지 않다. 초의선사의 은사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건방지게 까불지 말고 항상 풀옷을 입은 사람같이 소박하라”는 의미로 선사의 이름을 지어줬다고도 한다.

다례에 필요한 것은 지극정성이며 사람과 신불을 소중히 하는 겸손한 하심(下心)이지 차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어줍쟎게 우쭐하고 참선하는 이들을 쫓아내라는 것은 아닐 듯싶다.

이렇듯 최근의 다례는 쓸 돈 있는 중년여성들이 고급 녹차를 멋있게 올리는 차 문화의 양상을 띄고 있는 듯 싶다. 자격증은 물론이고 무슨 ‘차선생’이라는 감투까지 얹었지만, 한편으로는 ‘위대한’이 붙은 유교적인 ‘현모양처’를 강요받는 여성들의 모습도 없지 않다.

보이지 않는 희생이 강요된 일그러진 여성상과 함께 그에 대한 보상과 같은 ‘시어머니’상과 같은 모습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다. 이제 가족 사회에서 달라져야 할 성인지와 성역할의 문제로서 ‘차문화’도 한번 뒤돌아봐야 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차 한잔 정성껏 다려 조상신과 사람들께 올리는 사람이 여성일 필요가 없다. 남성들이 차를 우려서 여성들에게 대접해도 좋다. 하지만 이런 성역할의 단순한 교체를 이야기하려는데 흥미는 없다.

오히려 ‘차’를 통해서 ‘올림’이 아닌 ‘나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이야기하는데 관심이 있다. 높은 분에게 차를 올리는 문화가 과연 이 시대에 맞는 ‘차’를 정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는다.

그런 입장에서 ‘차’란 무엇인가에 적어도 차인이라면 저 마다의 답을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할 듯싶다. 물론 듣는 이가 납득할 정도의 명료하면 더 좋을 듯싶다.

20세기에 ‘보이차’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 속으로는 ‘보리차’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인지했을 사람도 없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보이(boy)차’라고 하면 ‘걸(girl)차’는 없어? 여자는 못먹는 차야? 등등 피부가 얼어붙는 ‘아제개그’까지 나올 정도로 보편화 일로에 있다.

물론 그 길에는 엄청 비싸다거나 중국 것이라서 가짜가 많고 몸에도 해로운 물질도 있다는 의혹론이 커다란 장애물로 앞을 가로막고 서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차가 보편화되고 있는 것은 ‘효리네민박’이라는 방송프로그램 덕이 크다. 하지만 그 덕만으로는 보이차가 우리 일상생활 속에 성큼 다가오지 못했을 것 같다. 결국 누가 소개했든 간에 보이차 만의 능력이 없었다면 이 모든게 모래성위의 집처럼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했을 것이다.

보이차는 20년 이상된 생차 떡차(圓餠) 즉 청병(靑餠)을 제외한 대부분이 커피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아울러 미생물 발효차라는 ‘건강한 다이어트’의 반려자라는 측면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보이차를 일찍 접한 선배격인 얼리어답터(early adopter)나 전문가들에게 물으면 진품도 어느 정도 가릴 수 있고 마음과 몸이 다르지 않다는 심신의학적인 측면에서 꾸준히 음용 시 놀라운 효과가 있다.

보이차의 매력은 단지 식품을 떠난 의약품적인 측면에 있지 않다. 차를 우리거나 끓이면서 손님들의 잔을 채우고 비우는 사이에 생기는 무언가가 다른 차들과 다르다. 어려운 다도를 배우지 않고도 편하게 마실 수 있으며,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살 수 있으며, 많이 먹어도 뒷 탈이 거의 없는 ‘대중성’이나 ‘편이성’에만 있지도 않다.

물론 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고급차나 그 문화가 보이차에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중국 시진핑에서도 금지했을법한 초호화사치사회의 몇백만원짜리 보이차 차회가 우리나라에서도 열린 것을 보면 보이차만 제외된다는 말도 아니다. 30년 아니 반세기이상이 지난 노차의 세계에서는 그런 컬렉터 수준의 차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차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의 고통을 풀어준 실마리가 보이차에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늘처럼 소중하다. 손님은 왕이라는 말도 있다. 손님이 소중하기에 그 앞에 내는 차도 소중하다. 옛날 중국에서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대신 차를 올렸다고 한다. 그만큼 차가 귀했지만, 결국 차가 사람 목숨을 살린 샘이 된다. 그런 차를 인륜에서 가장 소중한 효를 상징하는 조상 제사 때 지내는 다례에 우리 조상들이 쓴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6차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오늘날에 손님이나 조상, 나아가 남성이나 가부장일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우리고 누구가 함께 하는 ‘나눔’이라는 측면에서 동반자인 차를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까다롭지 않고 그냥 일상에서 예전에 엽차가 그랬듯이 바로 그 자리에 보이차를 대신하는 것은 어떨까?

누구나 차주전자(차호 茶壺)에 차를 우리고 끓이고 하면서 ‘친구’의 비워진 찻잔을 건강과 행복을 채워주면 될 듯 싶다. 일상에서 만나는 친구나 지인과 편하게 함께 나누는 보이차, 어느 순간인가 우리에게 차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는 보이차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로 자연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있다. -하도겸 칼럼니스트는 나마스떼코리아 대표로, 회원들이 네팔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 운영하는 지유명차 성북점에서 가끔 팽주로 자원봉사하고 있다-

노차 8892 품평회 준비 모습

 

하도겸 茶禪칼럼니스트/NGO나마스떼코리아 대표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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