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뛰어들 수 있는 신수종 사업 선택하라" 이건희 회장 재계의 별 지다...과감한 반도체 투자로 미래를 볼 수 있었던 경영인

기사승인 2020.10.25  11: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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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경영 복귀 이후 스마트폰 시장 영향력 확대 집중...심근경색으로 와병 6년 만에 끝내 별세

[여성소비자신문 김희정 기자]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향년 78세로 6년 투병 끝에 별세했다.
 
이 회장은 지난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하 뒤 6년 간 투병해왔다. 당시 이 회장은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켜 인근 순천향대학 서울병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CPR)을 받았다.
 
이후 삼성서울병원에서 심혈관을 넓혀주는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고 심폐기능이 정상을 되찾자 입원 9일 만에 중환자실에서 병원 20층에 있는 VIP 병실로 옮겨져 장기 입원 치료를 받았다.
 
삼성전자는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지는 가운데 상주는 장남인 이 부회장이 맡는다. 부인 홍라희 여사와 두 딸 이부진 호털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빈소를 지킬 예정이다. 국장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지하 2층 17호실에 마련될 예정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투병해왔다. 이 회장은 지난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 사후 핵심 경영권을 승계 받아 무역 중심이던 회사의 방향성을 전자산업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삼성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변모시킨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이 회장은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53년 일본에 유학했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다녔으며 1965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1966년 9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고 이건희 회장은 1966년 9월에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같은 해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해 1968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됐다.
 
이후 반도체 사업 등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처지던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내는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고 이 회장은 아버지 이병철 회장을 설득해 반도체 분야에 당시에는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금액의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하는가 하면 반도체 만이 한국이 장래 신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간파한 경영인이다.
 
이병철 회장의 삼남이었지만 자신에게 경영권 승계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십분 활용해 대한민국의 반도체 산업의 발전에 기여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이른바 '신경영'을 내세우면서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을 주창했다. 신경영은 지난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호텔에서 열린 선언식에서 그가 했던 발언인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슬로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경영은 1993년 삼성전자 세탁기 불량 사건,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시내 전자제품 매장에서 삼성전자 제품이 매장 구석에 먼지 쌓인 채 놓여있던 상황 등이 맞물리면서 제시된 경영 의제다.
 
고인의 질적 성장에 대한 위기 의식이 신경영 선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신경영을 시작으로 삼성그룹이 글로벌 시장의 무명 기업에서 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1994년 10월 첫 애니콜 제품인 'SH-770'를 내놓는 등 휴대전화 시장에서 본격적인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와 관련해서도 이 회장은 품질 경영을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른바 '구미 화형식'으로 불리는 불량 제품 소각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구미 화형식은 1995년 구미 운동장에서 500억원 상당의 불량 전화기를 불태운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 회장은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할 목적으로 소각을 지시했다고 한다.
 
같은 해 8월 애니콜 제품군은 당시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 1위였던 모토로라를 제쳤으며, 국내 시장 점유율 51.5%를 기록하면서 지배력을 확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그룹의 다른 한 축인 금융계열도 이 회장 시대에 구축됐다. 삼성그룹은 1988년 3월 삼성신용카드·동성투자자문을 설립하고 1991년 11월 현재의 삼성증권이 되는 국제증권을 인수했다. 1993년에는 삼성파이넌스와 삼성JP모건투자신탁을 세우면서 보험·증권·카드 등을 아우르게 됐다.
 
고인의 경영 철학 가운데 하나는 인재 양성이었다. 그는 1994년 학력과 성별을 철폐하는 열린 채용 제도를 도입했으며, 2002년부터 계열사별로 월별 핵심 인력 확보 실적을 확인했다. 연말 사장단 인사에서도 인재 영입 실적을 반영했다.
 
이 회장은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명의 직원을 먹여살리는 인재경영의 시대, 지적 창조의 시대"라고 말했던 바 있다.
 
그는 여성 채용 인력 비중을 30%로 늘렸으며 세계 시장별 맞춤형 인재 육성 제도인 지역전문가를 도입, 선발 인원 가운데 30%를 여성으로 배정하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경영 능력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특히 2002년에 세계 전자 업계의 선도 기업이던 소니를 넘어서면서 삼성을 바라보는 글로벌 기류가 크게 변했다.
 
비즈니스위크,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포춘, 타임 등은 특집 형식으로 세계적 기업으로 부상한 삼성의 성공 비결을 분석하면서 이 회장의 리더십을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2002년은 삼성전자가 낸드플래시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반도체 관련 기술과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당시 1위 기업인 도시바의 제안을 거절하고 독자적으로 낸드플래시 개발을 고집했다고 한다.
 
고인은 2005년 들어 '창조 경영'을 내세우면서 신사업 개척을 강조했다. 이후 삼성그룹은 신수종사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바이오, 나노, 로봇 등과 같은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그는 당시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지난 70년은 삼성그룹이 앞선 기업들을 벤치마킹하고 이를 통해 초일류 기업들을 따라잡는 시기였다"며 "하지만 세계적인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한 지금은 남들이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 이 회장은 2008년 4월 삼성특검으로 퇴진을 선언한 이후 23개월 만인 2010년 3월 경영복귀했다.  그는 2009년 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이유로 특별사면 복권된 이후 3개월 만에 오너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회장으로 공식 복귀했다.
 
이 회장의 전격적인 복귀배경에 대해 이인용 당시 부사장은 일본 토요타 자동차 사태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2월 중순부터 토요타 사태를 지켜보면서 사장단이 느낀 위기감이 컸다"면서 “삼성 사장단협의회가 2010년 2월 17일과 24일 이건희 회장의 경영복귀 문제를 논의한 끝에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글로벌 사업기회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이 회장의 경륜과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사장단협의회로부터 복귀 요청을 받은 이 회장은 당시 한 달여 만에 복귀를 수락했다. 이  회장은 이때도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으며 10년 내 삼성의 대표상품들이 다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당시 한 달여간 고심한 끝에 2010년 3월 24일 (복귀를) 수락했다.

한때 2008년 4월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략기획실이 해체된 뒤 삼성은 콘트롤 타워가 사라지면서 추진력이 크게 둔화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회장 퇴진 후 당시 삼성은 외형적으로 사장단협의회가 그룹의 콘트롤타워 역할을 맡아왔지만 사장단 협의회가 계열사 사장단들의 협의체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면서 상대적으로 그룹의 현안을 심도깊게 논의하고 대안을 마련하고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는 데 한계를 보여왔다는 게 그룹 내 해석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경제단체를 비롯해 재계에서는 이 회장 복귀의 필요성을 꾸준히 주장해왔다. 특히 2009년 12월 이건희 회장이 삼성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단독으로 사면복권됨으로써 이건희 회장의 복귀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사라지면서 이건희 회장이 회장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고 이건희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 주총을 전후해 삼성그룹 명예회장 겸 삼성전자 등기이사로 경영에 복귀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그룹 명예회장이 아닌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하는 수순을 밟았다.

이에 대해 이인용 당시 부사장은 “삼성전자가 그룹의 대표 계열사이니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을 대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삼성은 앞으로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삼성전자의 것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당시 삼성전자가 위기였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제 2010년 초 당시 전자업계의 동향이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급속도로 전환되면서 삼성전자가 고전하고 있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이 회장 복귀 직전인 2009년에는 애플이 핵심 제품만을 통해 50%에 가까운 영업이익을 올리는 동안 삼성전자는 10%대 영업이익을 올리는데 그친 상황이었다.

반도체와 LCD 등 부품 라인업을 보유하고 종합IT 업체로서의 시너지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란 기존의 강점 역시 이 같은 업계의 동향 때문에 많이 약해졌다는 분석도 있었다. 실제로 세계적인 칩메이커인 인텔 역시 넷북용 앱스토어인 ‘앱업 센터’(AppUp Center)를 개설해 넷북에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던 바 있다.
 
때문에 이건희 회장은 2010년 3월 삼성전자의 주요 사안들을 깊이 챙기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냉장고 폭발사고, 반도체 기술유출 등 때문에 삼성전자 내부의 기강이 전체적으로 해이해졌다는 판단도 많다.

이밖에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전에 삼성전자 회장으로의 복귀가 더 도움이 된다는 분석도 있었다. 이에 대해 2010년 3월 24일 삼성그룹 관계자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활동에서 삼성전자 회장으로의 복귀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이 2010년 3월 말 삼성전자의 회장으로 전격 복귀하면서 삼성의 ‘성지’로 불리는 승지원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승지원은 삼성의 ‘영빈관’으로 불리는 이건희 회장의 집무실이었다.

삼성그룹 사장단들의 신년인사와 해외 귀빈들이 삼성을 방문할 때면 이 회장은 언제나 이 장소에서 맞이했다. 그룹의 주요 의사결정을 위한 사장단 회의도 종종 이곳에서 개최되면서 삼성의 미래가 결정된 최고 의사결정의 거점으로 주목을 받아온 곳이다.
 
승지원은 삼성 창업주인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이 살았던 집으로 2010년 말 당시 한남동 하얏트호텔 정문에서 7~8분 정도 거리에 있는 1층 한옥건물로 대지는 300평, 건평 100평 정도로 본관과 부속건물 등 2개동으로 이뤄진 건물이었다. 고 이 회장은 이곳에서 주로 근무를 하고 중요한 사인이 생길 때 당시 삼성전자 서초사옥을 방문하곤 했다.
 
지난 1987년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후 이건희 회장은 집무실 겸 영빈관으로 이곳을 개조해 집무실로 활용하며 삼성을 찾는 내방객을 맞았다. ‘승지(承志)’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선친 이병철 회장의 경영이념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은 보안요원들의 철저한 경호로 외부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으며 이건희 회장은 주로 이곳에서 업무를 봐왔다. 태평로 사옥 시절에도 이 회장은 회장실로 출근하지 않고 이곳에서 사장단 회의 등을 열어 경영에 참여했다. 지난 2008년 특검 때 검찰이 처음으로 압수수색을 하는 등 수많은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초동 삼성본관에 이 회장의 집무실이 마련될 예정이었지만 이 회장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현장시찰과 해외 출장을 제외한 공식적인 경영활동을 이곳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승지원은 보안유지가 철저하다는 점, 그룹 수장들이 비공개로 현안을 논의하고 대책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어왔다.
 
이 회장은 승지원에서 일본 최대 재계 모임인 게이단렌(경제단체연합회)의 요네쿠라 히로마사 스미토모화학 회장을 비롯한 소속 인사들과 만찬회동을 가지기도 했다. 경영복귀 후 승지원에서 시작한 그의 첫 번째 대외활동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2010년 5월 10일 저녁 복귀 후 자신이 직접 주재한 첫 번째 계열사 사장단 회의도 이곳 영빈관에서 열었다. 한남동 승지원에서 공식적인 경영활동이 시작된 것은 2년만의 일이다.
 
이날 사장단 회의에는 장남인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과 당시 김순택 부회장(신사업추진단장), 최지성 사장(삼성전자), 장원기 사장(삼성전자 LCD사업부장), 최치훈 사장(삼성SDI), 김재욱 사장(삼성LED), 김기남 사장 (삼성종합기술원), 이종철 원장(삼성의료원), 이상훈 사장(삼성전자 사업지원팀장) 등이 참석했다.
 
이 회장은 이날 회의에서 “다른 글로벌 기업들이 머뭇거릴 때 과감하게 투자해 기회를 선점하라”고 주문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며 회장으로 복귀한 지 한달 반 만에 23조원의 투자결정을 내렸다.
 
이때 속도경영의 귀재다운 판단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이면에는 그만큼 삼성이 과감히 투자해오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배어 있었다. 일본기업들이 삼성에서 배우려는 ‘스피드 경영’이 수년째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 회장 공백으로 각사 최고경영자들은 수조원에 이르는 투자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사업이 지지부진했던 것을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과감히 투자하라” 스피드경영 주문

이건희 회장의 트레이드마크는 ‘질(質)’ 경영이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제품의 질’이 아닌 ‘삶의 질’을 화두로 들고 나왔다. 다른 회사보다 질좋은 제품을 빨리 만들어 시장을 장악하는 것이 그의 질 경영의 요지다.
 
그는 또 “환경보전과 인류의 건강 및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기업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질좋은 제품으로 세상을 채워왔지만 이제는 사회와 개인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함으로써 10년 후 먹을거리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이 회장은 복귀 당시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이 10년 후에는 모두 사라질지 모른다”며 신사업 발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바 있어 당시 결정은 모두가 예상했던 바라는 반응이었다. 다만 이 회장의 질 경영이 ‘상품’에서 ‘인류의 삶’과 관련된 것으로 한 단계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 삼성 관계자의 전언이었다.
 
이날 결정된 삼성의 미래 5대 신수종 사업도 모두 인류 및 개인의 삶의 질과 관련된 ‘녹색과 건강의료 산업’에 속하는 사업들이었다. 태양전지, 자동차용전지, LED,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등 5대 미래사업에 23조3000억원을 투자키로 결정했다. 그가 경영에 복귀한 지 채 1개월 보름만에 내려진 의사결정이다. 삼성은 이를 ‘넥스트 빅 싱(Next Big Thing)’이라고 부른다.

이인용 2010년 당시 커뮤니케이션 팀장은 사장단 회의와 관련한 브리핑에서 “신사업 결정의 기준은 기술 등 내부 역량을 갖추고 있느냐와 시장성이 있느냐”였다고 설명했다. 결국 삼성이 당장 뛰어들어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여부가 신수종 사업결정의 기준이 됐다는 얘기다. 이날 주요 사업담당 사장들과 함께 신수종 사업의 재무를 뒷받침해주는 이상훈 삼성전자 사업지원팀장이 참여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삼성은 이날 5개 사업 중 LED에 가장 많은 8조6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사업영역을 디스플레이 제조에서 조명, 자동차용 등으로 확대해 삼성LED를 2020년까지 매출 17조8000억원, 고용인원 1만7000명의 대형 회사로 키운다는 방침을 세웠다.
 
삼성전자가 추진 중인 태양전지 사업은 10년간 6조원을 투자해 매출 10조원짜리로 만든다는 계획을 그때 세웠다. 당시 삼성SDI가 진행하고 있는 태양전지 사업은 결정계를 시작으로 추후 박막계를 추진하고 자동차용 전지는 2020년 누적투자 5조4000억원, 매출 10조2000억원, 고용 7600명을 창출할 것이란 계획도 세웠다.
 
또 바이오제약은 수년내 특허 만료되는 바이오시밀러 중심으로 의료원 등과 협력을 통해 추진할 계획을 세우고 2020년 누적투자 2조1000억원, 매출 1조8000억원, 고용 710명을 창출할 것으로 보았다. 의료기기는 혈액검사기 등 체외진단 분야부터 진출해 2020년 누적투자 1조2000억원, 매출 10조원, 고용 9500명을 예상하고 향후 10년간 이들 사업에 23조원을 투자, 매출 50조원대의 사업으로 키울 계획이었다. 이 계획 가운데 국내외 정세의 급변한 변화 기류 속에서 일부는 성공했고 일부는 미약하나마 이 기조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고 이 회장은 외환위기 때는 선택과 집중, 탄탄한 재무구조, 상시 구조조정은 삼성은 물론 당시 국내 기업들의 슬로건이 될 정도였다. 위기극복 이후 삼성이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데 밑거름이 됐다는 게 재계의 일반적 평가다. 2000년대 들어 그는 글로벌 경영을 주창하며 국내 기업들의 관심을 세계시장으로 돌려놨다.
 
2003년에 고 이건희 회장은 천재경영론을 내놓고 “빌게이츠 같은 인재가 서너 명 있으면 국민소득이 3만달러에도 갈 수 있다”며 인재론을 펼쳤다. 삼성은 당시 해외를 돌아다니며 인재 스카웃에 나서기도 했다. 2005년에는 디자인경영을 앞세웠는데 그의 디자인경영은 삼성전자 TV가 세계 1위에 오르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창립 이후 삼성이 그룹 차원의 신수종 사업을 공식 발표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고 이건희 회장은 이날 일사불란하게 확정지어 미래사업에 대한 계열사의 투자방향과 전략이 앞으로 어떻게 실행에 옮겨질지에 대한 틀을 마련해 놓은 경영인이었다.
 
 
 
 
 
 

김희정 기자 penmoim@wsob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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